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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기다리는 새벽, 어슴푸레한 남청색 밤공기가 창 틈 사이를 비집고 흘러들어온다. 점멸하는 가로등의 불빛들이 힘을 잃고 꺼지는 순간이면 항상,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이더라도 잠이 드는것은 언제나 그 순간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않았다. 이리저리 데굴거리다가 웅크리기도하고 엎드려도보면서 몸을 뒤척였지만 좀처럼 자기 편한 자세를 찾을 수 없었다. 온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는데, 정신은 몽롱하고 어지러운게, 지금 당장 기절하기 일보직전인데도 잘 수 없을것 같았다. 몸은 잠들었는데 머리는 억지로 깨려고 하는 느낌이라구 해야하나. 제발 잠들자, 자, 자고싶다고. 망할. 속으로 욕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눈을 질끈감고 잠들기만을 바랬다. 체감상 한 두시간은 족히 지난것같은데도 엄마는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고있다. 생각해보니 내일 아침이나되서야 온다고 했던것같기도...젠장, 그럼 진작에 오늘 밤샜을텐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끼리릭..하면서 슬쩍 벌어진 문 틈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조금씩 조금씩.. 일렁였다. 그 모습이 왠지모르게 낯이 익다. 

 홀로 남은 집 안, 어두운 방, 벌어진 문 틈, 왠지 낯설지만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이상하게 알 수 없는 불안감만 커져갔다. 빨리 자고싶은데 양이라도 다시 세어볼까, 아까도 한 1400마리쯤 센 것같지만……. 이러다가 밤을 새는건 아닌가하고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하던 찰나, 눈 앞에 어느 남자의 실루엣이 다시금 일렁거리며 그려졌다.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리고 어떤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순간에서 기억이 뚝 끊어져버렸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어릴때, 가끔씩 집에 찾아오는 엄마의 손님들이 있었다. 어쩌면 내 아버지였을지도 몰랐을, 내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 얼굴은 언제나 달랐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보면 가증스러운 웃음을 띄우곤 하룻밤만에 사라졌지만 그 중 몇몇 얼굴에 제법 기름칠 좀 되보이는 어른들은 비싼 과자, 사탕, 젤리 등 간식거리들을 한 박스씩 사다주기도 했었다. 내겐 그저 간식 공급해주는 자판기들 따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끔, 가끔가다보면 마치 진짜 아버지처럼 나를 챙겨주는 그들을 보면서 엄마는 

'에릭, 조만간 네 아빠가 생길지 모른단다.' 하면서 입이 귀에 걸린채 싱글거렸지만 언제나 일주일정도 지나고나면 엄마는 술에 잔뜩 찌들어 식탁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이 울곤했다. 언제나 그랬다. 엄마는 언제나 행복해하고 좌절해하고를 반복했다. 멍청하게도...

? 집을 찾아오는 남자들의 발이 끊기고 엄마가 밤늦게까지 일하게된 어느날 겨울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엄마를 기다리며 인형들과 차를 마시면서 심야 티파티를 즐기고있었다. 케이크를 자르던 폴리 프리시팬츠가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듯했다. 피터팬더와 머슬맨이 서로의 이야기에 신경이 몰려있을때 그녀가 내게 슬쩍 다가오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에릭, 슬슬 졸립지않니?"

  "그다지? 무슨 일이야, 폴리 프리시팬츠?"

  "오늘은 왠지 일찍 잠자리에 드는게 좋을것같아."

  "왜?"

  "……글쎄, 이유는 없어. 그냥 직감이야. 여자의 직감."

 

 그녀는 어째 말이 없었다. 내 눈치를 보는것 같기도하고, 단추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만 살짝 깨문다. 그리고는 인형상자를 가리키며 빨리 티파티를 끝내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폴리의 직감은 틀린적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모처럼 인형들과의 티파티를 일찍 끝내고 싶지않아서 엄마가 올때까지만 놀자고 권유해보았다. 폴리는 당연히 수긍했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채 고개만 끄덕였다.

 때마침 1층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왔다보다ㅡ 하지만 폴리의 안색은 더더욱 굳어졌다. 삐걱삐걱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이 어째 한 명의 인기척은 아니였다. 늘 익숙한 걸음 소리의 그림자 뒤로 조금 더 우직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라오더니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평소보다 더욱 생글거리는 엄마, 그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검은 머리의 낯선 '그' 남자.

 

  "아가야, 엄마 왔어. 일단 여기.. 아저씨께 인사드려."

  "안녕? 네가 에릭이구나."

  "저 뺀질이는 또 누구야, 엄마."

  "에릭!"

  "하하, 괜찮습니다. 아저씨는 무슨. 편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렴."

 

 남자는 악수를 청하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한 내가 그 악수를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하자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일부러 무안감을 주려고한 내 행동에도 남자는 아랑곳않고 천천히 내쪽으로 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아아아-주 기분나쁘게. 물어보지도않은 지 이름을 잘도 씨부리면서 앞으로 잘지내보자니 어쩌자니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뭐야 이새끼는? 언제봤다고 친한척이야, 재수없게. 대꾸를 삼키고 녀석의 손등을 쳐냈다. 보통같은 다른 사내들이었으면 버르장 머리없다면서 적당히 내게 관심을 껐을터인데 대체, 씨팔 저놈은 뭐가 그리도 신이난건지 내 얼굴을 보면서 줄곧 싱글거렸다. 뺀질거리게 생긴게 더럽게 기분나빴다. 기분이 나빴다.. ... .. 기분 나빴다기보단, 조금 섬뜩했다. 녀석의 이름따위는 까짓걸 기억할정도로 내가 기억력이 좋은것이 아니고,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었지만 나를 보면서 지었던 그 소름끼치는 웃음만큼은 기억난다.

 그 지긋지긋한 놈은 거의 이틀사흘에 한 번꼴로 우리 집에 찾아왔다. 항상 엄마를 기다리던 내가 잠들기직전, 새벽1시 10분. 방 문을 슬쩍열고 내 이름을 불러댔는데 내가 깨있는것을알면 또 괜히 말을 걸고 친한척할까봐 계속 자는척을 했었다. 으, 그런데 그것이 더욱 고역이였다. 엄마도 아닌것이, 그것도 몇 번 본적도 없는 낯선 성인남자가 침대 맡에 앉아서 잠들기전까지 자신의 앞머리와 정수리 부분을 기분나쁘게 만지작거린다고 생각해봐. 씨발 그건, 그건 정말 어떻게 말로 설명못할만큼 기분이 더럽다고. 참다못해 방 문을 잠가놓으면 낄낄거리며 그것마저 따고 들어오…아, 이거 완전 또라이 변태새끼아냐? 엄마는 왜 이딴 새끼를 계속 집에 불러들이는거야?

 

  "에릭, 삼촌은 어떤것같니?"

  "그 자식이 왜 내 삼촌이야."

  "에릭, 그 분은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고 좋은 분이셔. 아이들도 정말 좋아하시구. …같이 살면 행복할것같지않니?"

  "싫어."

  "왜..?"

  "몰라. 엄마 그 새끼 이상해. 생긴것도 기분 나쁘고 그냥, 맘에 안들어."

  "……"

  "폴리 프리시팬츠도 그 놈은 정말 아니라고했어."

  "……아아, 에릭...아가야, 엄마랑 약속 하나 해주겠니? 며칠동안만, 딱 며칠만 삼촌과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주렴, 그럼 네 생각이 바뀔수도 있으니까... 그럼 모든게 다 잘될거야. 이번에 엄마 말 잘들으면 뭐든지 사줄게. 메가레인저도 사줄게. 레드, 블루, 그린 전부 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으며 조금 울먹이면서 목인 메인 소리로 애원하듯이 내게 말했었다. ..그걸 받아드린다고해서 딱히 손해 볼 거래같진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메가레인저 다 사주면 그때되서 난 저 놈이 새아빠 되는건 절대 싫다고 죽어라 떼쓰면 되는거지, 뭐. 그래서 그러겠다고 말했다. 말했다... 말했는데…… 

아, 이게, 어쩌면 여기서부터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이 날 이후로 자세한 기억은 잘나지않는다. 기억이 부서져 서로 이가 맞지않는 퍼즐조각처럼 머리 속을 나뒹굴어 돌아다녔다. 유일하게 기억나는것은, 난 그 날 이후로부터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는것. 손이 닿지도않는 등에 조금씩 생채기가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몸 구석구석에 파란 멍이 들어있었다. 손목에 빨갛게 강하게 붙잡힌 자국과 두 눈엔 다크서클.. 그 때 나는 네살이었다. 매일 밤, 엄마가 없는 나 혼자인 밤, 내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는 날이면 나는 두 눈이 가려지고, 두 손이 결박되어 낯설되 낯이 익은 이상한 괴물에게 기분나쁜짓을 당하는 꿈에 시달렸다. 그것은 심지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보다도 끔찍했었다. 저항하면 맞았고 순응하면 입에 사탕을 물려주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잠식되어 몸부림 칠 수 조차 없었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은 대화용도를 잃고 덜덜 떨뿐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딱 한 번, 입을 열었던 적이있었다. 발악하듯 성대를 최대한 쥐어짜내 내가 애타게 불렀던것은ㅡ

 

  "..어…엄마. 엄마, 엄마!!!"

 

 뺨을 서너차례 맞아가면서도 계속해서 불렀다. 부르고, 또 부르고, 목이 째지고 소리에 핏방울이 맺혀 수천갈래로 찢어져 선홍색이 물들때까지 계속. 어미잃은 새끼늑대가 울부짖듯 미친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목이 터져라 부른 소리가 빈 허공을 떠돌다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못한채 공기속으로 사라지는것을 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깨닫게되었다.

 아무도, 내가 괴로울때 나를 도와주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없었다, 누구도.

그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 놈은 연행되는 그 순간까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었으니까. 그리고 날 보고웃었다. 그 때처럼.

 

 

 

 

 녀석이 사라지고 없는 이후에도 그 악몽은 계속되었다. 지금 이 순간마저. 매일 혼자인 밤이면, 그는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들어와 계속해서 이름을 부른다. 대답을 하던 하지않던 발자국소리는 점점 크고 생생하게 들려온다. 저벅, 조금씩, 저벅저벅, 가까이, 저벅저벅저벅. 제발 좀, 제발. 꺼지라고 욕을 내뱉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렸다. 이 꿈인지 환상인지모를 거지같은것을 빨리 끝내고싶어 주기도문도 외워보고-물론 반은 까먹었지만-귀를 틀어막은채 아랫입술이 피가나도록 씹어대봤지만 저 개같은놈은 사라지지않는다. 계속해서 가까워진다. 그건 듣지않더라도 느낄 수 있었다. 주기도문을 틀려서 그런가, 아님 이게 정말 현실이라서일까. …그럴리 없잖아, 그럼 뭐야. 이유가 뭘까, 어쩌면 내가 혼자니까……아, 내가 혼자라서.

 

  "엄마…왔어!? 엄마, 엄마 왔어? 거기없어? 엄마!!"

 

 젠장, 엄마는 엄마잖아. 엄마면 자식을 보호해야할 의무가있고, 또 내가 부르면 부르는대로 따박따박 와줘야할 의무가 있잖아. 그런 엄마마저 지금은 나한테 없다. 왜 나는 혼자일까. 왜 나는 항상 혼자일까. 왜 나는 항상 괴로울 때 혼자일까. 내가 너무 쿨해서? 그래서 다가오기 어렵나? 그런 심리라면 충 분 히, 이해하지. 하지만, 하지만 내가 뭐든 다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라면 그건 정말…….

 ..녀석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불을 살짝 들춰올려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징그럽게 속삭였다. 

 

  "에릭, 알잖아. 아무도 너 도와주러 안와."

 

 그건 어릴때부터 줄곧 놈이 해오던 익숙한 말이었다. 

 

  "넌 혼자잖아. 혼자야. 아비도 없지, 지 애미는 화냥년에 친구들 모두 널 싫어하는데 누가 널 도와주겠어. 응? 가엾다, 가여워. 불쌍한 것."

 

 개소리집어치우고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고싶었지만, 뱃속부터 뜨겁게 차올라온 무언가에 목이 맥혀 병신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이만 달달 떨고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미친듯이 떨리는 두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집었다. 갑자기 밝은 빛이 쬐이니 눈이 조금 따갑다. 시간은 새벽 두시였다.

 그런데 누구…누구한테 전화를 걸어야되지? 엄마는 핸드폰이 고장났고, 경찰한테 전화해봤자…멍하니 액정만 쳐다보면서 머뭇거리는 내 자신이 처음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도망쳐? 도망칠까? 도망쳐도 소용없잖아, 내가 혼자있는 한. 코끝이 찡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근데..이 시간에 안자고 나올애가 있을까? 아니, 잠깐.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그럼 친구란것들이 빠릿빠릿하게 와줘야지. 와서 날 도와줘야지, 그게 당연한거잖아.

 어깨에 놈의 손이 닿는순간 나는 기겁하며 슬리퍼도 신지못하고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놈은 낄낄거리며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앞으로 털썩 주저앉곤 입에서 걸쭉한 검붉은 액체를 토해내더니 찌그덕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지더니 놈의 옆구리에서 거미처럼 괴상망측한 팔 두 개가 더 튀어나와 손가락을 미친듯이 꼼지락거렸다. 혀는 뱀처럼 길게 늘어뜨려지고 눈동자는 1초에도 수십번 여기저기 굴러다녔고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발을 떼기 시작했다. 와, 씨발. 씨발. 징그러워. 진짜 잡히면 끝장이야.

 뒤를 돌아볼새도없이 생각도없이 무작정 달리다 발을 디딘곳은 주방이었다.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밑, 선반, 냉장고…어디에 숨지? 계단쪽에서 쿵쾅거리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등에 식은땀이 쓱 베어나왔다. 여기있다간 들킬지도 몰라. 싱크대에 기어올라가 작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더니 꽝하고 눈바닥에 내리꽂혀버렸다.

 으, 춥다. 오늘따라 더 추운것같아. 그럴만도한게.. 지금 눈 밭 위에 잠옷 한 장과 맨발인 상태로 쓰러져있으니까. 추운거 잘 참는편인데, 아무래도 내가 망할 에스키모는 아닌지라 면 한장 걸치고 초겨울의 날씨를 견디긴 힘들었다. 눈송이가 묻은 손과 발은 마취한듯 감각이 무뎌지고 얼얼하게 땡땡 부어있었다. 저온화상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이제야알겠네……이딴식으로 알고싶진않았는데. 최대한 벽 쪽으로 등을 붙이고 끝이 붉게 얼어붙은 발가락을 부여잡고 호호 입김으로 녹여보려했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내가 무슨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뭐야, 이게. 이러다 정말 얼어뒤지는건 아닐까. 손에 쥔 핸드폰이 보인다. 배터리는 2퍼센트, 저걸 어디 세스코에 신고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으, 나더러 어쩌라는거야. 터져나올것같은 설움을 꾹꾹 참으며 침착하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섯번정도 신호음이 가더니 툭 하고 받는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카일!!! ……나, 나야…에릭."

  "..너 지금이 몇신줄이나 알아?"

  "으음, 두시 조금 넘었으려나..? ……있잖아, 카일! 끊지말구 들어봐. 정말 주..중요한, 문제야. 정말.

 지금 발 여섯달린 괴물한테 쫓기고있어. 나..나, 맨발에 잠옷바람으로 뒷마당에 나왔는데 여기있는거마저 들키면 나 완전 끝장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

  "아니, 정말. 진짜라니까..! 부탁할게. 나, 나 진짜 너무 추워. 이빨 떨리는거 들리지? 카일, 나 도울 수 있는게 너 밖에 없어. 내가 믿을게 너 밖에없어, 제발.. 앞으로 내가 너 놀리지도 않을거구 앞으로…"

 

 

 

 *

 

 

 

  -뚝. 배터리가 다 된 전화는 매정하게 끊어지고 카일은 반쯤 감긴 눈을 꿈뻑거리며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있었다. 아, 이 망할 돼지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저번에도 냉동인간이되고 500년후의 미래로 끌려갔었다니 이제는 뭐, 다리 여섯달린 괴물한테 쫓기고계신다? 밀린 과외숙제를 하다가 10분전에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안그래도 얼마못잘 단잠을 깨버린 에릭에 대한 분노는 상당했다.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꽂아내리고 힘없이 슬리퍼를 끌며 침대에 누웠다. 뭐하자는거야. 자기 안졸리다고 나까지 잠을 못자게하려는 속셈인건가? 저 뚱보놈이 한밤중에 거는 전화는 다 헛소리지ㅡ 하면서 카일은 이불을 끌고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문의 조금 틈새로 한기가 슬금슬금 밀려온다. 

 …그러고보니 오늘 되게 춥다던데. 틈사이로 실날같이 새어나오는 찬바람은 코를 베어갈듯이 차가웠다. 무릎으로 거의 기다시피 걸어가 열링 창을 마저닫고 피곤함에 힘이 쭉 빠진 카일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누웠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않았다. 침대에 누우니 오히려 눈이 말똥해졌다.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카일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곱씹어보는듯했다.

 

  "진짜로 밖인가…? ..추울텐데.."

 

 카일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금새 흠칫하더니 ..내가 방금 뭔소릴한거야? 하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카트맨 그 자식 속셈은 언제나 같아, 늘 그럴듯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그걸로 놀려먹잖아. 몇년을 같이다녔는데 그걸 모르겠어? 자자, 그냥 자. 다리 여섯개인 괴물이래봤자 개미겠지. 신경쓰지말자. 카일은 인상을 구기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눈을 감고 제발 좀 자려는데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만약에, 만에하나, 혹시 정말…'하고 의지와는 다른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돼지새끼, 아까 좀 코맹맹이 소리나던데 설마……울었나? ..에이, 에릭 카트맨이 울긴 뭘울어. 어디서 처맞고 징징거리기야 하겠지만. 흠, 그럼..감기걸렸나? 잔병은 좀처럼 안걸리는게… 하기야, 이 날씨에 정말 밖이라면 없던 병도 생길것같긴해. ..으, 젠장, 나 또 속는거아냐? 그 놈이 밤에 나한테 전화해서 말한거치고 진짜였던적이 없잖아. 다리 여섯달린 괴물이라니, 세상에 그딴게 있을리가 없잖아. 있더라도 경찰에 신고했어야지, 나한테 전화를 해?

 ..그런데 만약에, 정말… 정말이라면? 정말 믿을게 나 밖에 없는거라면..?'

 

 카일은 야릇한 표정으로 다문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릭 카트맨,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녀석의 이름은 너무나도 많다. 지옥에서 올라온 녀석, 사탄의 자식, 극악 쏘시오패스ㅡ 모든 악질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언제나 혼자서 모든것을 해냈고 혼자만을 위해 살아왔으며 제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속되게 말해 후레자식이였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못하는 싸이코패스, 친구가 죽어가던말던 밥그릇만 챙기면 상관없는 놀부 심보. 그게 나 또한, 모든 사람들이 느낀 너에 대한 인식일터인데. 넌 그런 놈이란 말이야. 그런 놈이라고. 그런데 친구인 나도… 사실은 잘모르겠다. 어디까지가 겉이고 어디까지가 속인지. 

 <나는 아빠가 없어서 밤마다 울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그 모습도, 유일하게 믿을 친구였던 인형들을 총으로 쏴죽이면서 울었던것도, 잘 때 깨울때마다 누군가를 향해 비명을 지르면서 깼던것도. 아, 넌…넌 어쩌면. 

 무언가 뇌리에 찌릿하고 스쳐지나갔다. 카일은 몸을 일으켜세웠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있던 겉옷을 꺼내입고는 아까 데워놨던 핫초코 캔 두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망할 뚱땡이자식, 사람 귀찮게하는 재주는 타고났단 말이야, 아주."

 

 카일은 문을 나서면서 투덜거렸다. 그 불평 속엔 짜증도, 귀찮음도 일절 없었다.

 

 

 

 

 

 파들거리는 입술에 쪽빛이 돌면서 욱신욱신거리던 손끝 발끝의 신경이 조금씩 무뎌졌다. 쨍그랑, 쾅, 쨍. 집요하게 자신을 찾는 그것의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귓바퀴에 맴돌아 입에선 조용히 입김만 내뿜을뿐이다. 얼음불꽃이 온 몸을 휘감고 이곳저곳에 빨갛게 그을린 자국을 남겼다. 마치 칼로 살을 도려내는것만같다. 눈꺼풀을 들 힘조차없어 솜빠진 인형처럼 널브러져 도망갈 생각은 할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태로 눈발위를 달리라는것은 발바닥 가죽을 잘라 뜨거운 달군 불판위를 달리라는것과 비슷한 상황……. 질퍽 쩍 찌그럭, 쾅, 그것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눈발을 지려밟으며 뽀드득 뽀드득 코앞까지 다가온 인기척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ㅡ

  "너…여기서 뭐해?"

 

 마치 이 세상이 정전이 된듯, 방금전까지만해도 고막을 긁어내릴듯한 끔찍한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나서 들려온것은 뜻밖에도 아주 반갑고...낯익은 목소리였다. 힘겹게 눈을 뜨자 흐릿한 흰 안개같은것 위에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있다. 살짝 인상을 쓰고 조금 더 크게 떴다.

 

  "카..카일? ……카일 맞아? 와준거야..?"

  "..그래서, 어딨어? 그 다리 여섯달렸다던 괴물은."

  "……"

  "이럴줄 알았다. 이걸 확 그냥."

  "……"

  "..야, 일어나. 여기서자면 입 돌아가." 

 

 비몽사몽한 정신에서도 카일의 얼굴임을 확인하고나서야 온 몸에 긴장이 풀린 에릭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카일이 본 에릭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손발은 붉으스름하다못해 고무장갑을 낀것처럼 새빨갰고 물에 불려놓은양 퉁퉁 부어있었다. 겨우 하루만에 열 밤은 샌것처럼 눈밑은 퀭하고, 얼굴 군데군데 희미한 생채기와 잔뜩 부르튼 입술은 푸르뎅뎅하게 변해서 바들거리고있었다. 카일은 코를 잔뜩먹은 에릭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너 울었냐?'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제 성격에 웬수같은 자신에게 이런 꼴을 보인것도 민망할텐데 최소한 녀석의 자존심이나마 지켜주고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바람이 차다. 온 몸이 오슬오슬 떨리고 눈 때문에 끝이 젖은 바지자락이 발목에 닿을때마다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올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나도 이렇게 추운데 얘는 오죽할까, 카일은 주머니에서 캔 두 개를 꺼내서 하나 따서 마시더니 다른 하나는 에릭의 뺨에 갖다댔다. 순간 뺨이 녹는듯한 따뜻함에 에릭은 흠칫, 놀라 멍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야..음, 그러니까. 크흠! 뭔 일인진 몰라도 힘내라. ...나 간다. 너도 그거먹고 조금이라도 더 자. 내일 또 졸다가 혼나지말고."

  "…자, 잠깐.. 카일."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다. 그런데 또 혼자 남게된다면……가버린다면. 가버린다면.

 

  "가지마."

  "뭐?"

  "이왕, 못잔거.. 오늘만 밤 새."

  "와……니 새끼 양심도 없냐? 새벽 3시에 사람 불러다가 한다는 소리가.."

  "가지마. ...이유는 묻지말고, 그냥. 해뜰때까지만……."

  "그게 무슨.."

  "엄마가 올때까지만.."

 

 에릭은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떨구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꼴이 마치 꼭 수술실에서 단말마를 느끼고 죽은 환자같다…. 카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뒷목을 긁적이더니 에릭의 몸을 일으켜 세워주기위해 손을 잡았다. 헉, 한씨의 과장없이 마치 얼음을 집은것처럼 차가웠다. 딱딱하게 굳은듯 붉은 손가락을 그 상태에서 굽히지도 피지도 못하고 바들거리기만했다. 간신히 일으켜세웠는데 새빨간 발가락 끝으로 까치발을 선 채 이리저리 휘청거리는게 이 상태로 혼자 집에 보낼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이 시간에 잠도 못자고 이게 뭐하는짓이야!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에릭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곤 그와는 대비되게 혹시나 그가 돌맹이나 유리조각 같은걸 밟게되진않을까 땅을 뚫어져라 살피며 최대한 살금살금 부축해주었다.

 

 

 

 * 

 

 

 

 버스 정류장에 서서 친구들을 기다리던 스탠과 케니는 카일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했다. 조금 충혈된 눈을 한 채 하늘색 마스크 사이로 연신 기침을 해대며 좀비처럼 걸어오는 카일의 모습은 무슨 결핵환자 같았다.

 

  "세상에, 카일! 너 어디 아파?"

  "어……감기."

  "(너 어제 밤샜어?)"

  "어……."

  "너 상태 진짜 안좋아보여. 오늘은 그냥 집에가서 쉬어."

  "..됐어. 다음 주가 시험인데…콜록."

  "안녕, 얘들아."

 

 뒤 쪽에서 에릭 말을 걸었다. 그 또한 콜록거리며 입에 하늘색 마스크를 쓰고있었다. 좀처럼 잔병에 걸리지않는 그가 마스크를 쓰고있는건 제법 생소한 그림이었다. 인사를 받아주는 스탠이랑 케니 사이에서 카일은 가방끈을 꼭 부여잡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릭을 노려보았다. 에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뚱한 표정이었다.

 

  "뭐야. 뭘 봐. 망할 유대인아."

  "그으냥- 어제 집에 잘 들어갔나 해서."

  "엥?"

 

 반응을 보니 어제 그 대형급 민폐를 부려놓고 기억도 못하는듯했다. 카일은 어제 통화기록을 보여주며 제한테 진 빚들을 낱낱이 읊을수도있었지만 솔직히.. 상당히 쪼잔해보이는짓인데다, 어떻게보면 기억못하는게 본인한텐 이로울지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기로했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걸로봐선 몸상태는 괜찮은가보네, 어젠 완전 죽기직전이였으면서. 약간의 안도섞인 한숨을 내뱉고 입을 다물었다. 에릭은 영문을 모른채 눈만 깜빡였다.

 

  "아, 맞다. 나 어젯밤에 진짜 이상한 일 있었어."

  "(뭔데?)"

  "어제 존나 이상한 다리 여섯달린 괴물한테 쫓기고있었거든. 주방 창문으로 도망가다가 자빠져서 얼어뒤지기 직전인데 누가 와가지고 방까지 데리고 올라가선…"

 

 카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괴물?)"

  "..얘들아, 버스온다. 빨리 조용히하고 타러갈까?"

  "이상한 일이 아니라 꿈이였겠지, 멍청아."

  "아 쫌, 닥쳐봐, 스탠. 꿈인데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겠냐? 암튼 그 사람이 내 방까지 데려가서 침대에 뉘여주고 그..그..저온화상? 그거랬나. 난방틀어주고 내 손이랑 발 입김으로 다 녹여주고 마사지해주고 그랬는데 그게…"

  "(몽정이네.)"

  "그러게."

  "니들 좀 닥쳐봐, 꿈 아니라니까? 그래서 난 엄만줄알았어. 근데 오늘 엄마가 집에 안들어왔단 말이야. 그럼 누구겠냐고."

  "꿈이야."

 

 카일은 버스를 오르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에릭은 조금 미간을 구기며 대꾸했다.

 

  "꿈 아냐."

  "다리 여섯달린 괴물이라니, 그런건 없어. 넌 그냥 악몽 꾼거야."

  "오, 그래? 내가 어제 완전 얼어뒤질뻔한거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건, 맹세코 꿈이 아니였다고, 카일! ……그리고.."

  "시끄러, 버스나 타."

 

 카일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에릭은 '…그 마스크 우리집에 있던거 아니야?' 라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우연이겠거니하고 조용히 버스에 올랐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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